8卷4冊,附錄2卷1冊 : 四周雙邊 半郭 20 x14.5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1 x 21 cm.
조선 중기의 학자인이유장의 시문집이다. 할아버지는 주부 이진(李珍)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이정발(李廷發)이다. 안동 풍산에서 태어났다.1657(효종 8)년 이휘일이 내방하여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고 수창(酬昌)했다. 1660(현종 1)년 사마시에 진사 3등으로 합격 하였다. 1667(현종 8)년에 대도솔촌(大兜率村)에우거(寓居)하였다.1689(숙종 15)년에 대신(大 臣)이 행고학우(行高學優) 천이독실(踐履篤實)로 천거하였다. 6품계에올라 와서별제(瓦署別提) 와 공조좌랑으로 제수되었으나 모두나가지 않았다. 1669(현종 10)년에 어머니상을 당한후, 두문불출하였다. 이후 강학(講學)에 전면하면서 『주역(周易)』․『춘추전(春秋傳)』 등에 깊은 관심 을 가졌고, 특히 주자(朱子)와 퇴계선생의 예설(禮說)을 절충하여 독자적인 이론 체계를 구축하였다. 한편 이론을 분류, 수편(手編)하여 「이선생예설(二先生禮說)」을 만들었고, 우리나라 역사책을 산절(删節)하고 요약 한뒤에 자기의 의견을 곁들어 『동사절요(東史節要)』를 만들었다. 1691(숙종 17)년에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제수되었으나 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사양 하였다. 그해 겨울 익위사익찬으로 제수되었지만 입직(入直)한지 7일 만에 낙향하였다.
1694(숙종 20)년 이조판서 이현일이 낙향하면서이유장을 영남의 학덕이 높은 노인으로 천거했다. 1701(숙종 27)년 5월 14일에 사망하였다. 1729(영조 5)년 동향(同鄕)의 인사들이안동에 낙빈정사(洛濱精舍)을 세워 향사하였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 문집은 손자재기(載基) 등이 편집해 놓은 것을 1775(영조 51)년 현손 홍진(弘辰), 상진(象 辰) 등이간행하였다. 문집 중 시는 품격이 청고하고 중후하나, 사실적인면에서도 날카로운 지감을 보인다. 「과선성(過宣聖)」․「방수락대(訪水落臺)」 등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잘 묘사하여 오랜만에 만나는친구들의 기쁜 얼굴에 비유시켰다.
「답유졸재서(答柳拙齋書)」․「답김군중담서(答金君重擔書)」 등의 서(書)에서는『심경』․『근사록』 등에서 추출된 성리학에 대한논변, 『가례』에 미진한 예설의 심층해석, 인물성동이에 대한견해 등 광범위한 문제가 다루어져 있다. 「선생유사(先生遺事)」는 이황의 유사 가운데 『계산 기선록(溪山記善錄)』에서 누락된 부분, 일상생활에서 특이한 점, 가동(街童)들의 전언에서보충하여 학자들의 귀감을 삼게 하였다.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은 주희와 이황의 예설에서 중요부분을 초록, 정리하고, 두 분의 학덕을 추모하고 행동을 모방했다. 그 밖에 예안 이씨의가계를 밝히고 문중의 인사들을 칭찬한 「예안이씨족보서(禮安李氏族譜序)」, 향양재의 연역과 주위 경관을 설명한 「향양재기(向陽齋記)」가 있다.